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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로마의 명연설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by 굿센스굿 2023.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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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인이자 변호사 및 라틴어 작가로 유명한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연설과 저작은 라틴어의 전형적인 표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사상은 희랍 철학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해석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발견되어 서양 철학과 문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의 명연설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키케로의 삶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 1월 3일 이탈리아 아르피눔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로마 시민이었으며 귀족 계급이 아니었습니다.

뛰어난 연설력과 논리력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기원전 63년에는 로마의 최고 행정직인 집정관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철학과 법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수사학과 법학을 건실히 다지고 나서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집정관으로서 카틸리나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의 연설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연설은 카틸리나 반박문이라고 불리며 라틴어 수사학의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폼페이와 카이사르의 갈등에서 중립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결국 카이사르의 독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키케로는 정치적으로는 공화정을 옹호하는 입장이었고 군주정에 반대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갈등에서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했으나 안토니우스에게 적대감을 사고 기원전 43년에 암살당했습니다.

죽기 전까지도 연설과 저술을 계속했으며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현재까지 전해져 왔습니다.

키케로의 사상

희랍 철학의 다양한 학파와 사상가들을 소개하고 비교하면서 자신의 견해와 비판을 덧붙였습니다.

키케로의 사상은 주로 희랍 철학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해석하는 데에 집중되었습니다.

특히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윤리학과 정치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인간의 본성과 행복, 도덕과 법, 정의와 자유 등에 대해 논했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의 삶과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철학을 제시하려고 했습니다.

키케로는 또한 수사학과 문학에도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라틴어의 우수한 예시로 삼아졌습니다. 라틴어로 연설과 저술을 할 때 어떻게 표현하고 구성해야 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또한 로마의 종교와 신화, 법과 정치, 역사와 문화 등에 대해 다양한 주제로 썼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로마의 생활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서양 철학과 문학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인용되고 있습니다. 키케로는 로마의 명예와 자유를 수호하려고 노력한 인물로, 그의 연설과 저작은 로마의 명예와 자유를 상징하는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키케로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그의 삶과 사상은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키케로의 정치적 여정

기원전 75년, 31세의 나이로 로마 정치 무대에 발을 디딘 키케로. 처음에는 재무관으로 시작하여 5년 뒤 안찰관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키케로는 유명한 페레스 반박문을 쓰고 기원전 66년에는 법무관으로 선출되어 당시 정계의 실권자인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변론을 펼칩니다.

43세의 나이에 이른 키케로는 지방 신출내기로 로마 최고 관직인 집정관으로 선출됩니다. 그의 집정관 재임 동안 카틸리나 역모 사건을 적발하고 원로원 최종권고를 선포하여 로마를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기존 원로원 체제의 문제를 비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재판 없이 혐의자를 처형한 행위는 후에 문제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60년에 제1차 삼두정치 협약이 이루어지면서 키케로는 공화국 체제를 고수하는 입장에서 실권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됩니다.

특히 클로디우스의 고소로 키케로는 로마에서 추방되며 귀향 허가를 받아 로마로 돌아와 정계에서 거리를 두게 됩니다.

이 시기(기원전 55년 - 51년)에는 키케로가 철학적 저작에 주력하며 [키케로의 국가론], [웅변가에 관하여], [법 온]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기원전 49년, 로마 공화정의 내전에서 키케로는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합니다.

카이사르로부터 사면을 받은 키케로는 다시 정치 무대에 올라가지만, 카이사르의 독재 정치에 대한 회의와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패배하면서 키케로의 운명은 카이사르의 손에 달렸습니다.

기원전 45년, 키케로는 딸 틀 리 나의 사망으로 삶의 보람을 상실하게 되며, 기원전 44년에는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공화정을 회복하고자 하기는 희망 속에서 안토니우스를 비난하는 필리피 차이는 발표합니다.

그러나 기원전 43년, 안토니우스를 배척하면서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를 과소평가하게 되며 자신의 정치적 노력이 헛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키케로의 죽음

안토니우스에게 죽음을 맞이하다

기원전 43년 12월 7일, 키케로는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에게 죽음을 피하기 위해 피신합니다.

희망을 모두 버리고 로마를 떠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에 의해 카이에다에서 암살당했습니다.

그러나 키케로는 제2차 삼두정치에 의해 살생부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암살 당시, 키케로의 머리와 양손이 잘려 나머지 시체는 로마 광장에 공개적으로 내려 놓쳤습니다.

이는 안토니우스가 키케로를 규탄하고 그의 옹호하는 공화주의 신념을 공격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키케로 시체의 일부를 광장에 내걸어 두어, 공화주의를 지키려던 키케로의 결연한 모습을 두려워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키케로의 죽음은 고귀한 이상을 위해 희생한 그의 정치적 신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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