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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삶과 철학은 하나 장 폴 사르트르

by 굿센스굿 2023.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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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입니다.

그는 철학뿐만 아니라 문학비평, 영화 시나리오, 연극, 정치평론,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썼습니다.

20세기 중반에 정치계와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1945년에 편집장 및 [현대 Les Temps moderne] 잡지의 창간자로 활동했습니다.

사르트르의 주요 철학적 작품으로는 [존재와 무] (1943),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1946), [변증법적 이성 비판] (1960) 등이 있습니다.

그의 저술은 당대 프랑스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소설로는 [자유의 길], [벽], [구토], 연극으로는 [닫힌 방], [파리 떼], [악마와 선한 신], [공손한 창부], [알토 나의 유폐자] 등이 있습니다.

그는 문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자서전[말](1964)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노벨 문학상 수상까지의 삶을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1964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수상을 거절한 사례로도 유명합니다.

신문 [리베라시옹] 창간에도 기여하였으며 발행을 광고하기 위해 길가에서 직접 신문을 팔기도 했습니다.

그의 생애에는 중요한 지식인들과의 교류가 있었는데 레몽 아롱, 모리스 메를로퐁티, 폴 니장, 알베르 카뮈, 베니 세비 등이 그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삶과 철학은 하나 장 폴 사르트르

"나는 잡종처럼 나의 철학으로 내 삶을 나중에 옹호하려 하지 않으며,

현학적으로 나의 철학에 내 삶을 맞추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실로, 삶과 철학은 하나이다."

- [가짜 전쟁기 수첩 중]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수필, 연극, 소설, 철학 저서, 전기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으로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의 철학은 전후 시대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동시에 그는 참여하는 지식인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그의 동지이자 문학계 동료이기도 한 알베르 카뮈와 함께 그의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1941년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이후, 사르트르는 점령기 당시 애매한 태도로 인해 레지스탕스 참여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1980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하여 세간의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동시대의 투쟁에 전적으로 참여하였고 자신에게 정의로 보이는 입장들을 열렬히 신봉하였으며 그는 20세기의 볼테르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사르트르는 그의 삶을 2차 세계 대전을 중심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존재와 무](1943)에서는 존재론에 중점을 둔 이론적인 철학적 접근을 보여주었습니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1960)에서는 자신만의 방법론을 제시하며 더욱 실천적인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이 두 번째 시기는 어빙 고프먼과 같은 질적 연구를 중점으로 하는 사회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르트르의 작품은 철학적인 이론과 현실적인 실천을 결합한 독특한 접근이었습니다.

그가 시대를 넘어서 영원한 의미를 갖는 인물로 남게 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장 폴 사르트르의 어린 시절

1905년 6월 21일, 파리 16구의 미냐르로 13번지에서 장폴 샤를 에마르 사르트르가 태어났습니다.

흥미로운 점으로 어머니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사촌이었습니다.

그는 부르주아 가문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는 알자스의 지식인이자 교수 가문 출신인 슈바이처 가문의 일원이었습니다.

또한 삼촌 노르주는 파리 이 공과 대학 출신의 조선 공학자였습니다.

아버지 장 바티스트 사르트르는 프랑스 해군 장교로 활동하였습니다.

어린 사르트르는 아버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사르트르는 아버지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자라나야 했습니다.

그가 태어난 지 15개월 뒤인 1906년 9월, 아버지는 인도차이나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한 열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기를 함께 지나온 독일어 선생 리에 장송 등 세기는 사르트르에게 독일어를 가르쳐 주면서 뜻밖의 교육자로 남았습니다.

10살까지의 시절을 보낸 외할아버지 샤를 슈바이처는 소르본 대학교의 독문학 교수였습니다.

사르트르가 나중에 인정받을 의료선교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백부였습니다.

사르트르는 아버지의 일찍 떠남과 선천적인 근시와 사시 등의 신체적인 특이성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느낀 낯섦 등으로 어려운 심리적인 시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들은 그를 탐구적이고 독립적인 정신으로 이끄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외할아버지의 교양과 지식은 그의 학문적 탐구심을 크게 자극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나중에 그의 작품과 철학적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학생 시절

사르트르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리에 몽테뉴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리에 앙리 4세로 16살에 이르러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는 5학년과 6학년을 보냈습니다. 이 기간에 그는 훗날의 작가인 폴 니장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만남은 둘의 긴밀한 우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우정은 1940년에 폴 니장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이러한 우정의 도움으로 사르트르는 자신만의 개성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학문적인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장난과 농담도 잘 하였습니다.

1922년부터 사르트르는 폴 니장과 함께 리에 루이르그랑에서 고등사범학교 입학을 2년 동안 준비했습니다.

그는 울적한 지방 교사의 이야기를 다룬 짧은 콩트 두 편을 쓰며 첫 문학 작품을 창작했습니다.

동시에 학급에서는 니장과 함께 장난꾸러기 분위기 메이커가 되었습니다.

고등사범학교에서는 사회학, 철학, 심리학을 전공하며 메를로 퐁티, 레몽 아롱 등과 교제했습니다.

1927년에는 니장과 함께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하였습니다.

1928년에는 1급 교원 자격인 아기 레가 시온 시험에서 낙제하였습니다.

1929년에 다시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했습니다. 이때의 차석은 사르트르의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시몬 드 보부아르였습니다.

이후 이들은 1929년에 계약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

사범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사르트르는 11월에 입대했습니다.

18개월간 기상 관측병으로 군 복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중에는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극적으로 풀려나게 되었고 이 경험을 통해 삶의 자유와 가치에 대한 깊은 고찰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31년 제대 후에 사르트르는 파리와 파리 근교의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지식으로 쓴 "진리의 전설"이라는 20페이지 분량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출판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경험은 사르트르에게 글쓰기와 철학적인 표현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을 유발했습니다.

1932년 사르트르는 베를린 프랑스 문화원의 강사 레몽 아롱으로부터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때 후설의 아이디어에 푹 빠지게 되며, 다음 해인 1933년에는 프랑스 문화원의 장학생으로 베를린으로 유학했습니다.

베를린에서 현상학을 좀 더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철학적인 관점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1935년 사르트르는 상상력에 대한 실험을 위해 의사 라갓슈로부터 메스칼린 주사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험은 곧 공포와 우울증으로 이어져 반년 동안의 힘든 시기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사르트르의 삶과 작품에 영원한 공포를 심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철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철학자

파리로 돌아와 교직 생활을 다시 시작한 사르트르는 1936년에 문학 작품을 저술하기 시작했습니다.

단편 소설인 "[벽]"을 완성하였습니다. 이어 1938년에는 소설 "[구토]"를 출판하여 문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가 어떤 철학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을 맞이하였습니다. 1940년 독일군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1941년 가짜 신체장애 증명서를 이용하여 수용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파리로 귀향한 사르트르는 멜 퐁티와 같은 대독 저항 운동 단체을 조직하며 항전을 시작했습니다.

1943년 철학서 "[존재와 무]"를 발표하며 사르트르는 철학자의 지위를 공고히 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생각과 철학적인 관점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당시의 철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독일에 대한 포로 시절과 레지스탕스 활동을 통해 얻은 경험이 이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르트르는 레지스탕스 활동 중에 알베르 카뮈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카뮈와의 만남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지식인의 우정으로 이어졌습니다.

1945년 10월 사르트르는 제3의 길을 알리기 위한 잡지 "[현대]"을 창간했습니다.

이 잡지에서 그는 실존주의에 대한 다양한 토론과 의견을 전개하면서 문필 활동에 종사하였습니다.

1945년 미국에서 초청받아 강연하며 사르트르는 국제적인 무대에 발을 디뎠고 세계 각지에 자신의 철학과 생각을 널리 알렸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급격하게 확대되었고 이는 그가 얼마나 중요한 철학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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