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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현상학과 심리학의 접점에서 빛난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

by 굿센스굿 2023.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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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 eau-Pony, 1908-1961)는 프랑스의 철학자, 심리학자, 교육가로서 20세기 현상학의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인간의 지각과 언어와 문화, 행동, 정치와 역사 등에 대해 깊이 있는 해석과 분석을 하였습니다.

파리 고등사범학교와 사르트르

메를로퐁티는 파리의 리에 루이르그랑에서 중등 교육을 마치고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시기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사르트르와 친분을 쌓았고 이후에도 사르트르와의 교우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1930년 철학 교수 자격시험을 차석으로 합격하였습니다.

메를로퐁티는 교사와 조교로서 여러 학교에서 근무하였습니다. 그는 사르트르, 보게, 카르노, 콩도르세 등의 시세에서 고등사범학교 준비반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또한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조교로서 철학을 강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다양한 철학적 문제와 토론에 참여하였습니다.

현상학과 심리학의 접점에서 빛난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

메를로퐁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군 복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쟁의 현장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 폭력과 정의, 용기와 비참 등에 대해 체험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제5보병연대와 제59경보병사단에서 복무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행동의 구조](1942)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전쟁과 레지스탕스

메를로퐁티는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한 후에도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는 레지스탕스의 잡지[레 템퍼 모델은](Les Temps moderne)의 창간에 참여하였습니다. 사르트르와 함께 레지스탕스의 지도자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많은 위험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철학적 태도와 정치적 입장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소르본과 콜레주 드 프랑스

메를로퐁티는 1945년 소르본에서 [행동의 구조]와 [지각의 현상학](1945)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각의 현상학]은 그의 대표작으로 공간과 시간, 인간의 지각과 신체, 자아와 타자 등에 대해 현상학적으로 탐구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세계관과 존재 방식을 새롭게 조명하였습니다.

메로 퐁티는 이어서 리옹 대학교와 파리 대학교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1952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철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콜레주 드 프랑스는 프랑스의 최고 학술기관으로 앙리 베그그송, 에두아르 르 루아, 루이 라벨과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이 교수직을 맡았습니다.

메로 퐁티라는 이곳에서 "철학의 찬미"라는 제목으로 첫 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

후기 철학과 사망

메로 퐁티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지각의 현상학] 이후의 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언어와 문학의 현상학](1953), [인간과 세계](1959), [사인과 의미](1964) 등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는 예술과 정치, 언어와 문화, 역사와 자유 등에 대해 현상학적으로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와의 대화와 비판을 시도하였습니다.

메로 퐁티는 1961년 5월 3일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존재와 세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64)이라는 저서를 남기고 갔습니다.

이 저서는 그의 후기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지각과 행동, 언어와 문화, 정치와 역사 등에 대해 현실적이고 창조적인 철학을 제시하였습니다.

그의 철학은 현대 철학과 인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인간의 존재 방식과 세계관을 새롭게 생각하게 하는 철학자입니다.

메로 퐁티는 현상학과 심리학의 접점에서 빛난 철학자입니다.

한국전쟁 시기 잡지[현대]에 기고한 사르트르의 기사인 [공산주의자들과 평화](1952년)는 그의 특유 독립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1950년을 기점으로 한 사르트르의 태도는 어렵사리 지지를 받았지만 메를로퐁티는 잡지 운영에 있어 사르트르가 마르크스주의 글을 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불만을 표명했습니다.

실제로 이 기사는 1952년 12월호에 선행하는 기사 없이 실릴 수 없다고 메를로퐁티가 주장했습니다.

두 사람 간의 전화 통화는 2시간 동안 팽팽하게 이어졌으며 이어서는 세 통의 긴 편지 교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편지들은 그들 간의 지식인의 역할, 정치 및 철학적 견해차뿐만 아니라 성격적 차이까지를 잘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통신은 파리 고등사범학교 학생 시절부터 이어져 온 둘의 우정이 깨졌음을 보여주었고, 프랑수아의 빌트에 따르면 둘 중 어느 한쪽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결별의 순간으로 비쳤습니다.

메를로퐁티는 당시 유명한 현상학적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의 코기토 적이고 관념적인 입장에 반대하였습니다.

몸과 의식 간의 독특한 관계를 제시했습니다.

그의 철학은 후설의 현상학, 특히 생의 세계에 대한 후기의 사색을 기반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행동의 구조와 지각 세계에 대한 연구를 전개했습니다.

또한, 관념론과 실재론의 전제를 모두 배척하면서, 사물이나 인간적 실재를 관념으로나 실제로 환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그의 철학은 인간적 실재의 이의성(二義性)을 조명하면서, 정치, 역사, 언어, 예술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독특한 전망을 제시하려 노력했습니다.

현대 잡지의 중심에서 정치와 문학을 아우르다

1945년 10월 현대 잡지가 창간된 이후부터 1952년 12월까지 그리고 실제 "결별"이 일어난 1953년 7월까지 메를로퐁티는 이 잡지의 운영위원 중 한 명이자 정치면에서의 논설 기자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장 폴 사르트르와의 관계에서 벗어나며 현대 잡지에서 문학과 정치의 교차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또한 정치 무대에 발을 디딘 적이 있습니다.

1958년에는 총선을 목표로 하여 비공산주의 및 반드골주의 좌파를 통합하는 민주 세력동맹(UFD) 단일화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참여를 통해 사회 및 정치적인 이슈에 민감하게 대응하였습니다. 다양한 이념과 흐름을 통합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53세의 나이로 메를로퐁티는 1961년 5월 3일 저녁 집무실에서 데카르트의 [굴절광학]을 읽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이로써 메를로퐁티는 중대한 저작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미완성으로 남겼습니다.

메를로퐁티는 1940년에 결혼하여 외동딸 마리안(1941-2019)을 낳았으며 마리안을 통해 후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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