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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망치를 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by 굿센스굿 2023.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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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로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서구 철학의 흐름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 전통적인 철학의 기조를 깨기 위해 노력하며 '망치를 든 철학자'로 불립니다.

1844년 10월 15일에 태어나 1900년 8월 25일에 세상을 떠났지만 생애는 현대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이성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비이성과 광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니체의 주요 작업 중 하나는 그리스도교 도덕과 합리주의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안티크리스트'에서 그는 유대인들이 도덕과 종교를 왜곡하고 사기로 가득 찬 망상 속에서 모든 것을 복구 불가능한 정도로 왜곡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따라 유대인 혐오의 근거로 그의 일부 작업은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니체는 유대인이 세계의 외면은 물론 내면까지 사기로 전복하는 운명적 민족으로서 중요하고 고귀한 정신을 가진 귀족 같은 자들의 진정한 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망치를 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그러나 그는 강자의 입장을 찬양하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약자의 도덕을 칭송하기도 해 모순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니체는 민족주의, 전체주의, 기독교, 국가주의, 반유대주의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파시즘 등에 종종 왜곡되기도 했습니다. 해석상의 문제를 던지며 진리의 가치를 탐구하는 니체의 질문은 그의 철학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니체는 현실에서의 삶을 사랑하고 대지에서의 삶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영원한 세계'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관념론적 형이상학에 반대했습니다.

기독교를 비판하였으며 예수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교리 차이를 비난했습니다.

니체의 철학은 그의 삶과 시대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과 논의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과 가정

독일 철학의 거장으로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예전의 프로이센인 작센 지방의 작은 마을인 리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출생일은 1844년 10월 15일로 당시 그의 아버지인 카를 빌헬름 루트비히 니체가 루터교 목사로 임명되어 있던 시기였습니다.

니체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왕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에서 "빌헬름"은 후에 니체가 빼 버리게 됩니다. 아버지 카를 빌헬름 루트비히 니체는 루터교회 목사이자 전직 교사였으며 1843년에 프란체스카 일러와 결혼했습니다.

부부에게는 엘리자베스와 루트비히 요셉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니체의 어린 시절은 가족에게 불행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카를 빌헬름은 1849년에 뇌 질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니체의 어린 남동생은 1850년에 사망했습니다. 이후 가족은 나오면 부르트고 이사를 하게 되었고 니체는 어머니 프란체스카, 할머니, 아버지의 결혼하지 않은 두 자매, 그리고 두 하녀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856년 니체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가족은 그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린 시절의 니체는 어려운 상황에서 성장하며 가정의 소식과 가족 구성원들의 죽음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철학적 사상과 성장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니체의 학문적 탐험과 철학적 깨달음

1851년 프리드리히 니체는 소년학교에서 시작된 그의 학문적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니체의 학문적 특출난 재능은 특히 음악과 언어 분야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인 구스타브 크루 크기와 빌헬름 필터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1854년 니체는 나오면 부르트게 위치한 돔 김나지움에서 학문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특별한 재능은 음악과 언어에 기인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슐포르타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시를 쓰고 음악을 작곡하는 등 다양한 예술적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슐포르타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았습니다. 니체는 이 기간에 살면서 벗어날 수 있었던 기독교적인 가족 환경으로부터 처음으로 거리를 둘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각과 철학적 자유를 안겨주었습니다.

1864년에 슐포르타에서 졸업하고 니체는 대학에서 고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분노하였고 니체는 짧은 기간 후에 신학 공부를 중단하며 결국은 신앙까지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환은 다비드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라는 책에서 얻은 영향으로 추정됩니다. 이 책은 니체의 철학적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니체의 철학적 탐험과 군 복무

1865년 니체는 아서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1866년에는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유물론의 역사와 그 지금의 의미에 대한 비판]을 읽게 됩니다.

이 두 저서는 그의 철학적 지식을 깊이 생각하게 하고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니체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지평을 확장하였습니다. 철학 이외의 분야에 대한 탐구에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1867년 니체는 군에 자원하여 입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군 복무 중에도 철학과 군 복무에 대해 내면적인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런 중 어떤 시집을 읽는 꿈을 꾸게 되었고 니체의 삶을 크게 바꾸게 됩니다. 이 꿈에서 받아들인 뜻은 전쟁과 싸움을 잊고 학문에 전념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꿈은 그에게 군 복무에서 벗어나 학문에 더 집중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1868년 3월 니체는 말을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해 가슴을 심하게 다치고 병원에 이송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군 복무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고 그동안 5년 이상에 걸쳐 꾸준히 군 복무를 하며 높은 직위까지 올랐던 경험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군 복무는 그에게 생동감 넘치는 경험이었고 예술과 철학에 대한 탐구의 기회였습니다.

이후 니체는 복무에서 해방되어 다시 학문에 몰두하게 됐습니다. 그의 철학적 탐험은 새로운 차원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니체의 학문적 복귀와 첫 철학 저서

니체는 장기간의 병가를 통해 학업에 다시 집중하였습니다.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 교수 아래에서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특히 1868년 10월에는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전학하였습니다.

새로운 학교에서는 에르빌 로제와 친구가 되며 나중에 그의 철학적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니체는 철학적인 탐구에 몰두하면서 그의 첫 번째 철학 저서를 출판하게 됩니다.

이 저서는 그의 학문적인 복귀를 상징하는 작품이며 철학적 사상이 처음으로 서적으로 발표되는 시점이기도 하였습니다.

이후의 작품에서 그는 더욱 깊고 독창적인 철학을 개발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퇴직 후의 유럽 여행과 정신병

35세에 바젤 대학교에서 퇴직한 이후 강연을 중단하고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1881년에는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한 시기에 튀니지로 여행하기로 계획을 세웠지만 건강 문제로 인해 이 계획을 취소했습니다.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졸도한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니체는 정신병 발작으로 완전히 정신 상실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10년간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어머니와 함께 예에서나 생활했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누이동생 엘리자베트가 니체를 바이마르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00년 8월 25일 니체는 바이마르에서 세상을 떠났고 엘리자베트는 니체를 고향인 리켄의 아버지 묘 옆에 안장시켰습니다.

니체의 생애 막바지는 정신적인 어려움과 병에 시달려 평화롭지 못한 시기였으나 이를 통해 그의 예술적 열정과 철학적인 작업에 전념한 끈질긴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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