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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볼테르 프랑스의 자유와 비판의 대부

by 굿센스굿 2023.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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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는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철학자로, 비극과 시를 통해 인간의 삶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대와 문화를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용기와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볼테르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겠습니다.

볼테르의 생애

볼테르는 1694년 파리의 공증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작품은 그가 쾌락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귀족들과 시인들이 모이는 ‘탕을(Temple)’이라는 문학 살롱에서 만든 것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 죄와 벌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24세에 [오이디푸스]라는 비극 작품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래서 법학 대학에 등록은 하지만 탕을 계속 드나들면서 사치와 방탕을 선망했습니다.

볼테르는 17세에 루이 리그랑(Louis LE Grand) 학교를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이에 반대하며 법조계를 택하라고 강경하게 권했습니다.

이후에도 소(Sceaux)성의 문학 살롱을 드나들면서 재기를 발휘하며 문학적 재능을 증명해 보이던 그는 24세라는 아주 이른 나이에 [오이디푸스]의 대성공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자유사상가와 사귀었습니다.

그러나 볼테르는 단순한 비극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1717년 루이 15세의 섭정 오를레앙공작 필리프 2세를 풍자한 시를 썼다고 오인돼 투옥되었습니다.

출옥 후 비극 [오이디푸스]의 대성공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는 또한 궁정에서도 주목받았습니다. 그는 '하루에(Arouet)'라는 평민의 성을 버리고 '하루에 2세(Arouet Lejeune)'의 글자 순서를 바꾸어 자칭 '등 볼테르 씨(M. de Voltaire)'가 되었습니다. 이 필명은 쉽게 받아들여졌고, 왕비는 친밀하게 그를 ‘내 가엾은 볼테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의 좋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공작이나 후작들이 자신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만류하거나 옹호해 주기보다는 재미있어하는 것을 본 그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슈발리에 등 루앙이 하인들을 시켜서 그를 곤봉으로 후려치게 했습니다.

그는 슈발리에에게 결투를 요구했지만 이 불손한 행위로 그는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영국으로 건너간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 풀려났습니다. 이러한 것이 불평등과 전제정치에 관해서 그가 겪은 첫 경험이 되었습니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서사시 [라 앙리 아들](La Henriade, 1728)를 출판하였습니다.

전제정치의 악폐를 통감한 그는 자유로운 영국에 공감을 가지고 로크와 뉴턴의 영향을 받아 비판 정신은 더욱 강고히 되었습니다. 라 앙리 안 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간 종교 전쟁의 에피소드와 앙리 4세의 즉위를 노래한 시입니다. 광신의 무서움을 고발하고 프랑스의 정치 체제를 비판했습니다. 1 수년간을 제네바에서 보내다가 1753년 프랑스령으로 제네바와 가까운 페르네에 정주하며 시·극시·우화·소설·수필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작품을 발표하여 전 유럽에 '볼테르 시대’를 이룩하였습니다.

1729년 프랑스로 귀국했지만 연극의 영향이 짙은 비극 [콩고](AZïre, 1732)에 이어서 발표한 [철학서 간](Lettres philosophiques)이 영국을 찬미하고 프랑스를 비방하였다는 이유로 당국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책은 불태워지고 그의 애인인 샤틀레 후작부인의 영지에 가서 10년간 저술과 연구를 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한때 프랑스 궁정의 역사 편찬관이 되었고 이어 프리드리히 국왕의 초청으로 프로이센에 가서 [루이 14세의 시대](Le Siècle de Louis XIV, 1751)를 완성하고 그 후 여러 곳을 전전하였습니다.

진보파의 영수로서 '페르네 장로’라 불렸고 반 봉건, 반 가톨릭 교회 캠페인을 전개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가톨릭에 대한 광신이 원인이 된 부정 재판을 탄핵한 칼라스 사건 등의 실천운동은 유명합니다.

볼테르의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작품은 [캉디드]

(Candide, ou l’Optimisme, 1759)

볼테르는 이 작품을 통해 당시 유행하던 낙관주의와 광신주의, 봉건제도와 식민주의, 전쟁과 노예제 등을 풍자하고 비판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사상소설로, 주인공 캉디드가 세상의 고난과 잔혹함을 겪으며 철학적인 교훈을 얻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볼테르의 유머와 비판정신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즐거움과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1 캉디드는 볼테르의 사상소설로, 주인공 캉디드가 세상의 고난과 잔혹함을 겪으며 철학적인 교훈을 얻는 이야기입니다.

캉디드는 웨스트팔리아의 툰더 텐 트롱크 남작의 성에서 팡글로스 선생의 낙천주의를 배우고, 사촌 퀴네공드와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들은 남작에게 쫓겨나고, 불가리아 군대에 강제 징집되고, 네덜란드에서 재침례교도를 만나고, 아메리카에서 원주민과 싸우고, 엘도라도를 발견하고, 프랑스와 베니스와 터키를 여행하면서, 전쟁과 병역과 조난과 지진과 종교재판과 고문과 폭행 등을 겪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팡글로스의 낙천주의가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마르탱과 카카부와 파쿠레와 쿤에고와 올든부르그와 다른 인물들의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결국 캉디드는 퀴네공드와 재회하고, 팡글로스와 마르탱과 카카부와 파쿠레와 쿤에고와 올든부르그와 함께 터키의 한 농장에 정착합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각자의 일을 하며, 낙천주의도 비관주의도 아닌, 실용적이고 현명한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캉디드는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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